명나라 후반기에 개 막장 황제가 연달아 4대에 걸쳐 나타나서 이미 권력은 내시들의 손 넘어 가고 쇄락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 때 등장하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어릴때 부터 자신을 보필 했던 측근 내시로 하여 중앙 본진의 상위 내시 들을 전부 때려 잡고 세상을 평정했다

 

숭정제는 이제 개혁을 통해서 망해가던 명나라를 바로 세워 나가기 시작 했지만 나라가 개판되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민란 농민반란 외세침입등 어려운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다

그중에서 난을 일으킨 이자성의 세력과 한반도 위쪽 훗날 청나라가 되는 여진쪽의 만주족 거란 등 합세 해서 세운 후금 세력은 이미 통제 불능이었다

 

숭정제

 

숭정제는 장수 오삼계에게 모든 병권을 주고 북동으로 보내어 후금이 명으로 들어 오는 길목 산해관을 차단하여 누르하치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때에 농민 반란군 이자성이 세를 뿔려 자금성으로 쳐들어 오고 있었다

숭정제는 오삼계를 불러 들일 수 없었고 정예군도 없었던 터라 급한 마음으로 북경의 시민 농민 상민등 백성들을 모으고 이자성을 방어 한다면 훗날 보상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은 삽자루며 곡괭이등 무기가 될만한 거라면 빗자루라도 들고 자금성 앞으로 모여 들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자금성 코앞까지 쳐들어왔던 이자성이 멀리로 대포 몇방만 쏘고는 후퇴해 버렸

그러자 숭정제는 별다른 전투도 없었고 사상자도 없었기에 백성들에게 주기로 했던 보상금을 주지 않고 쌩까버렸다 나라 재정이 바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명이 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실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자성의 2차진입때 숭정제는 똑같은 방법으로 백성들을 모아봤지만 아무도 나오질 않았고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서 망해버렸다

 

 

청나라 침입을 막느라 똥줄 타고 있던 오삼계는 벙~찌고 말았다

자신의 주군 숭정제는 자살했고 조국은 이자성에 의해 망해버렸다

여지껏 노략질 만큼은 하지 않았던 이자성이 자금성을 정복하자 마자 갑자기 돌변하여 약탈과 살인 강간 등을 밥먹 듯이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오삼계의 부친 또한 가진거 다 뺏기고 살해 당했고 작부 출신이었지만 팔방미인이어서 자신의 뒷방에 들였던 최애첩 역시 이자성의 부하가 노략해 가버렸다 오삼계는 꼭지가 돌아서 청(나라)인 후금에 투항하고 청과 함께 자금성의 이자성을 쳐버린다

 

3일천하로 막을 내린 이자성은 도망치다가 죽고 오삼계는 청으로 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중국의 남서쪽 월남 버마 티벳을 마주하고 있는 당시로는 쓸모없고 버려진 땅을 하사 받고 번(테두리)왕이 된다

청나라 누르하치의 4대손 강희제때 삼번의 난이 일어나는데 그중의 한 인물이 오삼계다

강희제는 3번의난 때 살짝 티벳의 달라이라마와 오삼계 협공하자고 꼬뜨렸다가 개무시를 당하는데 이것이 강희제의 인상에 깊게 남게 되는데 삼번의 난 진압 이후 강희제는 티벳도 정벌해 버렸다

 

 

이자성을 평정한 후 명을 접수한 청은 그러나 그리 강한 나라가 못됐다

오삼계는 투항해서 청을 도왔지만 중국인인 한족이었고 한족은 원래부터 여진 만주 거란 이쪽 사람들을 오랑캐라 부르고 깔보고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었다

청은 명을 접수했지만 통치가 되질 않았고 변발을 강요하면서 듣지 않는 중국인 전체 인구의 25~50%를 죽였지만 여전히 혼란만 계속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강희제가 태어나고

청의 4대 황제로 등극하는데 그의 나이 7살 때였다 이 때의 청나라 정세를 보면

남서지방의 번왕으로 갔던 오삼계 쪽은 막강해졌고 서서히 청의 말을 듣지 않고 여기저기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고 북쪽의 몽골은 또한 끊임없이 괴롭혀 댔다 더 위쪽으론 러시아가 아시아로 진입해 오면서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또한 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 이후 황족들 여러명이 자신이 명의 적통 황제라면서 여기저기서 나라를 세우고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내부에 있었는데 증조부 누르하치때 부터 함께 전장을 누리며 청을 건국하는데 공신중의 특공신이었던 오배가 문제였다

 

청의 병권은 황제가 아닌 오배가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 들은 모두 오배 일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오배의 성격은 안하무인으로 황제 앞에서 보란 듯이 대신들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고 많은 대신들 앞에서 강희제를 큰소리로 훈계하기도 할 정도였고 심지어 내 새끼 손가락 하나면 황제의 허리도 부러뜨릴수 있다며 떠버리고 다녔다

 

강희제는 똑똑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깨닫고 감정에 따라서 함부로 나서지 않았고 오히려 오배를 칭찬하고 이미 최상위의 권력이 쥐고 있던 오배에게 없던 권력기관까지 만들어 녹봉과 함께 주기적으로 하사했다 이른바 빼앗을려면 먼저 줘라 라는 옛 말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제

 

10대 중반이 된 강희제는 귀족들의 자제들을 전통 씨름 연마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궁궐로 불러 들이고 똑똑하고 날쎈 인물들을 추려서 매일 씨름 연습을 시켰다 그런데 이것이 남이 볼때는 씨름이지만 안볼때는 초강도 군사훈련이었고 이들은 나중에 황제를 경호 보호하는 친위대가 된다

 

어느 누구도 애들끼리 모여서 전쟁 놀이와 씨름이나 하는 줄 알았지 전문 군사 훈련을 하는줄 몰랐지만 이들은 2여년 훈련 끝에 오배가 궁에 들어서는 순간 달려 들어 무장 해제 시켜 버리고 귀양을 보내고 언제나 같은 스토리지만 사약까지 내려버렸다

 

수장이 무너져버린 오배의 잔당들은 16살 먹은 강희제 밑으로 들어 오고 황권은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배는 눈의 가시였지만 청나라를 노리는 주변국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노련한 전쟁 용사 오배는 존재 만으로도 주변국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그 직전에 죽은 오삼계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하고 목을 잘라서 나무위에 걸어버렸다

또한 여세를 몰아 대만으로 건너가 그쪽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황제로 군림하고 있었던 명나라 황족들을 제거하고 대만을 먹어버렸다

 

 

 

 

1920년대 중후반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난을 일으켰다

모든게 그렇듯이 성공하면 정난이고 실패하면 반란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는데 성공한 장제스는 정변을 했다는 평을 들으며 국민당을 창당하고 수장이 되어 같은 상하이에서 창당한 공산당을 때려잡는데 심혈을 기울린다 이에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중 모택동이 속한 가장 큰 파벌중 하나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홍군을 조직하고 중국 남부에 있는 징강산으로 기어 들어가는데 이로부터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중국 남부에서 서부를 빙글빙글 돌아 북부 지방 옌안까지 반달모양을 그리며 대 탈주극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장정이라고 한다

 

장제스의 병력은 백만에 가까웠지만 홍군은 3만명도 안되는 고양이 앞의 생쥐였고 초반 몸뚱이 간수도 힘든 판에 완전 군장에 중화기 군수 물자 식량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몽땅 짊어지고 도망과 전투를 밥먹 듯이 하다 보니 3만 중의 2만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 때 지도부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던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이 부각되면서 가진거 다 버리고 적을 만나면 치고 빠지는 전술을 벌이게 된다

 

모택동은 무학이었지만 중국 고전과 역사에 지식이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들 앞에서 한번 입을 열어 이바구를 치면 모든 사람들이 마술에 걸린듯 빨려 들어 가는 말주변의 귀재였다 또한 이때에 1920년대 등소평 등을 비롯한 프랑스로 유학을 갔던 많은 지식층이 장정에 합세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모택동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사상과 전술등 공산 게릴라의 이론적 체제를 탄탄히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홍군은 개 처맞듯 장제스군에 깨지고 점점 더 장제스군을 피해서 자연인 심마니 들도 한번 들어가면 길 찾아 나오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산 깊은 계곡으로 꾸역꾸역 몰리게 된다 그런데 이 때 미국의 어느 종군 기자의 눈에 이들 홍군의 존재가 들어 오고 본국의 신문에 이들에 대한 짧막한 기사가 실리게 된다 쫒기는 신세지만 약탈은 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유비는 동탁의 횡포에 맞서 나라를 구하고자 거병 했지만 한개 중대 병력이나 될까 말까 초라한 신세였다 반면 조조는 이미 수십 만을 거느린 거물이 되어 있었고 아직 서로의 적인 동탁이 살아 있어서 서로 충돌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동탁의 중앙 정부군에 매맞고 여기 저기 잡군 들에게도 쫒기는 한심한 존재였다

 

그러나 유비는 덕이 있었다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고 농민들을 보호했다 약탈을 일삼는 여타 조직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유비현덕 이라고 했다

사람이 덕이 있으면 세상이 그를 알아 보고 돕고 따른다 애써서 획득 하려 들지 않았지만 유비는 독지가로 부터 하루 아침에 10만 대군과 군자금을 지원 받는 일이 생긴다

 

어느 미국 종군 기자가 본국으로 보낸 짧은 단신 하나가 돌고 돌아 다시 중국의 매체에 알려지게 되었고 중국 사람들은 그때 까지 홍군의 존재 조차 모르고 있었다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킨다 왜 쫒겨 다니는데? 그 개 고생 중에도 해악을 주거나 노략질 하지 않는다고? 홍군은 갑자기 영웅들이 되었고 가는데 마다 지원병들과 독지가가 넘쳐 났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보다 어려워 보였던 장제스의 백만 가까운 군대와 홍군의 남은 만여군의 쫒고 쫒기던 이 전세는 갑자기 역전이 되었고 홍군은 장정을 끝내고 이제는 거꾸로 장제스의 군을 때려 잡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초한지의 초나라 장수 항우와 같았고 모택동은 한나라 유방과 같았다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는 이 두사람에 의해 망하고 마는데 진나라 이전 전국시대 초나라 귀족 가문이었던 항우는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자존심 강한 전통적인 귀족이었다 반면 동네 건달 출신이었던 유방은 좋은 말로는 융통성 속된 말로는 얍쌉함 그 자체였다

 

싸움에서 무패를 자랑했던 항우가 진나라 20만 대군과 마주했을 때 진나라군 입장에서는 망해가는 나라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긴다면 좋겠지만 질것 같으면 항복하고 초나라 항우 밑으로 가서 다시 군생활을 하면 그만이었다 천하장사 항우는 역시 막강했고 진나라 군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는데 명예와 원리원칙이 본능이었던 항우는 포로에게 줄 군량미가 아깝다는 이유로 20만 대군을 살아 있는 상태로 땅에 묻어 압사시켜 버렸다

 

이 소문은 중국 전역으로 퍼졌고 항우와 싸우면 지면 당연히 죽는 것이지만 항복해도 죽는다로 인식되어 졌고 이 후로 항우의 적은 항우와 싸울때 마다 최후의 1인 까지 죽기 살기로 싸워 댔고 이것은 항우와 초나라 군에게 에너지 소비를 과다하게 하는 치명적이 독이 된다 반면 유방은 상대군이 항복을 하면 다 받아서 아군으로 편입시키고 그리 차별을 두지 않고 싸움에 참여하게 했다

 

장제스는 항우처럼 독선적이었고 적을 잡으면 잔인하게 살해해 버리는 인정사정 없는 냉혈인이었다 어릴때 헤어진 아들조차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살아갈 만큼의 원리 원칙 주의자였다 사람이 덕이 없으면 인정이라도 있어야 하고 인정이 없다면 최소한 유방처럼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장제스는 졸지에 쫒는 입장에서 거꾸로 쫒기는 입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모택동에게 쫒기다 결국은 50만군을 이끌고 대만으로 도망치는데 돈 재물 욕심은 엄청 많았던지 중국의 보물들을 왕창 훔쳐서 가져가서 박물관을 차려버렸다 중국이 대만을 불바다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타이페이 박물관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타이페이 박물관은 프랑스 루브르 대영박물관 바티칸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청나라 강희제가 정복했던 대만은 장제스가 중국 본토에서 넘어가면서 오늘날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티벳 또한 강희제에 의해 정복 당했고 강희제의 손자 건룽제에 의해 신장 위구르가 정복 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쪽 사람들이 중국인도 아니고 종교와 규범 성향 등이 중국 하고는 전혀 달라서 결코 중국에 동화 되어서는 살아 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국의 화약고인 것이다

건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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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불멸의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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