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리아빈 교향곡 1번 in E major Op. 26
Alexander Scriabin ( 1872-1915 )
Conductor : Riccardo Muti - Philadelphia Orchestra


1872년 1월 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스크리아빈이 태어나서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는 숙모에게 맡겨졌다.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888년에 사포노프의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1891년에 피아노로 금메달을 받았다.

출판업자 베라이에프는 일찍부터 스크리아빈의 재능에 주목하여 그의 작품을 평생 출판하는 계약을 하는 동시에 연주회의 매니지먼트를 맡아, 스크리아빈을 베를린,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에 데려가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 프로그램은 스크리아빈 자신의 작품 뿐이었다.

1897년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여 둘이서 파리를 연주 여행했다. 1908년 지휘자 쿠세비츠키를 알게되어 그 이래 그가 이끄는 관현악단과 함께 유럽 각지를 연주 여행했고, 1915년 4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근대 음악의 한 쪽 기수로서 동양 신비주의의 깃발을 세웠으며 새로운 화성 조직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스크리아빈은 신비주의라는 철학사상을 그의 음악에 포함시켜 배음열에 의한 신비화음을 창조해 내게 되었다. 
스크리아빈 자신이 ' 신비(The Mystic)'이라고 명했던 웅장한 종교철학으로서 그는 이러한 철학 부분적인 표현으로 음악을 만들려고 하였다. 자신을 초월자의 개념으로 인지시키는 니체의 철학에 이끌려 신지학과 범신론을 접하게 되며 나온 새로운 화성체계는 20세기 음악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스크리아빈 작품의 대부분은 피아노 곡이며 나머지는 관현악 곡, 한 곡의 실내악 곡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의 작곡분야가 협소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초기작품은 대개 길이가 짧으나 생애 말기로 갈수록 길이가 긴 작품들이 나온다. 그리하여 수많은 이론가나 역사가들은 그의 소나타와 교향곡들을 과대평가 하는 반면 소품들은 신비적 매력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피아노 작품 중 10곡의 소나타는 그의 예술적 발전의 성공적인 시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1번-4번 소나타는 초기에 작곡되었으며, 5번 소나타는 신비화음을 사용해 작곡한 곡으로 정상적인 이해를 넘어선 황홀감을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의 마지막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 9번, 10번 소나타는 전적으로 신비화음으로 작곡되었다. 


관현악 곡 중에서 마지막 3곡은 각기 부제목이 붙어있는데, 각각 '신성한 시' ,' 법열의 시','불의 신' 또는 '프로메테우스'이다. 
관현악 곡의 제목이나 표제, 신비에 관한 줄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서 스크리아빈 자신 스스로가 바그너의 범주 안에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함이 분명하다. 또한 음과 색의 결합을 시도하였는데, 그 작품은 프로메테우스로서 타악기는 사용하지 않고 관현악, 피아노, 오르간, 합창, 색광피아노(Color Keyboard)를 악보에 써넣었다. 
그는 신비에 있어서 그의 종교적 신념을 요약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오라토리오와 오페라는 음악, 언어, 동작, 냄새, 색을 끌어들여 작곡하려 했으나 이것을 위한 그의 계획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스크리아빈의 작품 시기 구분은 학자별로 다양하게 나뉘지만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하게 된다.

제1기
쇼팽의 영향을 받아 시정이 풍부하고 모방적인 경향을 지닌 피아노 소품이 많이 작곡되었는데, 쇼팽이 이용한 장르인 Prelude, Etude, Improptu, Mazurka등의 유형을 애호하였다. OP. 20이후 쇼팽의 경향은 많이 쇠퇴하지만 전체적 분위기는 그대로 가지고 있게 되었는데 스크리아빈은 쇼팽에게서 배운 반음계주의적 전음음계의 화성을 취급하여 풍부한 화성을 표현하였고, 엄격한 형식, 3박자 단위의 리듬 등이 이 시기의 특징으로 나타나며 2기와 3기에 가서 더욱 많은 발전을 가지는 4도 화음과 복잡한 리듬형태도 나타나 있다.


제2기
OP. 41-57(1903년-1909년)까지 의시기로 스크리아빈에 있어서는 가장 다작의 시기이다. 화성체계는 전통적인 수법을 벗어나고 있으며, 철학적인 신비주의 사상이 그의 음악에 파고들어 자신만의 새로운 신비화음을 제시하게 되고 또한 프랑스 인상주의와 접촉하게 됨으로서  인상주의의 무조성, 복조, 5도, 8도의 병행이 이루어지고 색채 적, 회화적 음악 기법의 영향을 받아 신비주의와 결합되어진 화성의 실험적 시도가 이루어진다. 
곡은 대부분 길이가 대폭 짧아지고 'Poem'이라는 곡의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자기 집중적 표현에 중점을 둔  곡을 작곡하였다. 
스크리아빈은 신성한 시 (The Divine Poem. OP.43)를 완성한 후 신지학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철학적이고 신비적인 세계의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은 소나타 5번(OP.53)에서 처음으로 단 악장 형태를 취하고 있는 3개나 4개의 소품들을 묶어서 하나의 작품으로 하고 있다. 
화성의 일반적인 특징은 규칙적인 불협화음, 합성화음인'신비화음'이 나타나고 리듬적이 면에서는 변박자의 연속적인 사용과 박자면 에서는 3박자 계통이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제3기
OP.58-74(1909-1915)에 해당하는 시기로 스크리아빈의 신비화음이 독자적인 작곡기법으로 확립된 시기이다. 신비주의에 입각한 신비화음을 바탕으로 그의 음악은 비논리적인 음정으로 구성된 화음을 사용하여 기존 지능 화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으며, 전통적 조성 체계를 벗어난 무조 음악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선율적 요소보다는 화음적 요소로 구성된 곡들이 많다. 교향곡 '법열의 시'는 스크리아빈이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할 수 있게 한 작품으로 반음계적 화성과 관현악 법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관현악 곡인 ' 불의 시'에서는 신비화음에 의한 새로운 음향을 사용하고 음악에 색채, 무용, 향기까지 포함시켜 종합예술로 승화시키는 음악 기법을 시도하였다.
구조적인 면에서는 단 악장 형식이 정립되었고, 조 기호의 사라짐과 변박자의 빈번한 사용, 다양한 악상과 템포로 인해 그의 곡은 상식 선에서 벗어난 모호성을 나타낸다. 
이 시기의 작품인 ' Five Prelude (OP. 74)' 는 스크리아빈의 완숙된 음악기법이 잘 표현되어져 있고 또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면에서 완숙도가 더욱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스크리아빈은 생전에는 작곡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다. 자신의 작품들을 청중들 앞에서 직접 연주했고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같은 곡임에도 스타일을 다르게 쳤었다.
 스크리아빈이 피아니스트에서 작곡가로 변하게된 사유가 리스트의 <돈쥬앙 패러프레이즈>를 무리하게 연습하다가 오른손을 다쳤기 때문이다. 슈만처럼 심하게 다쳐서 피아니스트를 포기해야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때 다친 손은 회복하질 못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왼손의 난이도가 유난히 높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작곡을 하게 되면서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쓰기 시작했다. 


또, 그에 대한 일화가 있다. 1903~1919년까지 뉴욕필의 지휘자로 있었던 바실리 사파노프는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스승이었다. 그는 언제나 스크리아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후에 그가 작곡한 교향곡 2번을 초연할 때 악보를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흔들면서 말했다. 
"여기 새로운 바이블이 있습니다. 여러분" 
소설가 톨스토이도 그가 연주한 프렐류드를 듣고 극찬을 했다.
 
그 당시에는 동기였던 라흐마니노프가 작곡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이 두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친하게 지냈지만 속으로는 숨겨진 라이벌 의식같은게 있었다. 라흐마니노프가 러시아 민속음악에서 멜로디를 따오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면 스크리아빈은 그 반대였다. 
그는 출판업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러시아 테마를 사용해서 서곡이나 카프리치오를 만들지 않는다는 걸로 러시아 음악가가 될수 없는가?" 


은연중에 라흐마니노프를 겨냥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1911년 스크리아빈의 교향곡 1번을 라흐마니노프가 지휘하는 계기로 그들을 둘러싼 소문들을 잠재웠다.

 피아노 협주곡 공연시에는 항상 스크리아빈과 같이 다녔다. 그 당시에는 전부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프로그램이었지만, 1915년 스크리아빈이 사망한 후에는 스크리아빈의 작품들로만 이루어진 프로그램으로 그랜드 투어를 했다.

 그 때가 라흐마니노프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작품보다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더 많이 공연한 때였다. 그리고 수익금은 미망인 타티아나와 세명의 자녀들에게 돌아갔다.

 투어 당시 20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던 프로코피에프가  
"스크리아빈이 연주하는 피아노소나타 5번은 하늘을 나는것 같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경우는 땅바닥을 기는것 같다."는 평을 해서 약간의 말썽이 있었는데 결국 프로코피에프와  
라흐마니노프는 평생동안 교류가 없게 되었다.
 
스크리아빈의 초기 음악은 쇼팽같은 낭만파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았었지만 후에 그는 쇼팽의 민족주의 스타일을 공격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신비주의와 에로티시즘이 풍기는, 당시 러시아 작곡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로 나갔다. 



Scriabin - Symphony No,1 in E major Op. 26
Conductor : Riccardo Muti - Philadelphia Orchestra
전악장 Play
 
1악장   Lento
2악장   Allegro drammatico
3악장   Lento
4악장   Vivace
5악장   Allegro
6악장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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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불멸의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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