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에프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in C major, Op. 56
Prokofiev ( 1891-1953 )
Violin1 : Anton Barrachovsky Violin2 : Vadim Repin

Sergei Sergeevich Prokof'ev (1891 손초프카, 우크라이나-1953 니콜리나 고라, 모스크바 근교)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노 주자였던 어머니에게서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받은 프로코피에프는 작곡에 놀라울 정도로 조숙한 재능을 나타내었다. 5세 때 피아노곡 인도의 갈롭을, 9세부터 10세 무렵에는 거인과 무인도에서라는 두 개의 규모가 작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생인 유리 포메란체프 Yuri Pomerantsev와 당시 아직 젊은 작곡가였던 글리에르에게 화성의 기초를 배웠고, 그의 작곡에의 시도는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1904년 페테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리아도프에게 화성을 배우고, 처음에는 빙클러 Vinkler, 이어서 에시포바 Esipova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비톨 Vitol에게 작곡을,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관현악법을, 체레프닌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또한 그곳에서 니콜라이 미아스코프스키와 알게 되었고 그와의 친교는 평생을 통해 계속되었다. 그러나 철학적인 음악 교육과는 성격이 맞지 않았고 오히려 일찍부터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프로코피에프는 최초의 몇 개의 리사이틀에서 드뷔시나 슈트라우스, 레거(음악원에서는 모두 악평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쇤베르크라는 작곡가의 작품을 초연하였다. 그의 연주자로서의 평가는 그 힘참과 테크닉으로 청중을 매료시키기보다는 청중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급속히 높아졌다. 그는 20세가 될 무렵에 유르겐슨사에서 몇 개의 초기 작품을 출판했다(슈만이나 레거, 라흐마니노프 등의 영향을 지닌 피아노 소나타 제1번,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연습곡과 8개의 소품). 1914년 프로코피에프는 루빈스타인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심사 때 오케스트라 반주로 자작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했다.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함께 이 작품(1911~12)에 의해서 프로코피에프의 양식은 확실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힘찬 리듬과 타법, 느닷없이 혀를 찌르는 듯한 격렬한 화성에의 기호, 이런 명확한 힘과 민속적인 선율의 감흥이 느껴지는 슬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서정성과의 대조 등이 엿보인다. 1912년에 마야코프스키를 포함한 러시아의 시인 그룹이 대중의 취미에 대한 일격이란 제목으로 미래파 선언을 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작곡했고 1913년의 초연 때는 대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협주곡은 독주자의 육체적 가능성의 한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말고도 피아노를 위한 10개의 소품 op. 12에는 보다 섬세하고 내면적인 프로코피에프의 또 하나의 측면이 표현되고 있으며, 이 양 극단의 두 측면이 각기 이 작곡가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14년의 런던 여행 때 프로코피에프는 디아길레프와 알게 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사를 본뜬 오페라의 계획에 그가 흥미를 보이길 바랐으나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적인 주제나 선사시대의 주제를 가진 발레를 그에게 의뢰하게 된다. 이것은 알라와 롤리로 실현되었다. 이 작품은 스키타이의 신화에서 제재를 취하여 시인 세르게이 고로데츠키 Sergei Gorodestki가 각본을 쓴 것인데, 디아길게프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이것을 다시 손질하여 스키타이 모음곡을 작곡했다.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힘찬 이 작품은 전편을 환상적인 꿈이 넘치는 힘찬 크레셴도로 끝맺는다. 스키타이 모음곡은 거대한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였으며 범몽고적인 사조의 계보 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대한 프로코피에프의 대답이었다.

 
디아길레프의 거절은 프로코피에프로 하여금 그와의 협력을 단념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발레의 주제를 찾게 했다. 어릿광대는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민요집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현되기까지에는 6년이나 걸리게 된다.
 
1916년부터 1917년에 걸쳐서 프로코피에프는 거의 모든 장르의 작곡에 손을 대게 된다. 이 시기에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하고(1917), 피아노 소나타 제3번과 피아노 소나타 제4번,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20곡으로 된 소곡집 잠깐 사이의 환영(1915~17) 등을 작곡했는데, 잠깐 사이의 환영은 쇼팽의 전주곡이 낭만주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를 그 시대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매우 대조적인 두 개의 작품, 고전적 교향곡과 칸타타 그들은 7인(1917~18, 개정 1933)은 콘스탄틴 발몬트 Konstantin Balmont의 러시아 혁명의 격동에 대한 예감 속에서 씌어진 〈칼데아의 기원〉을 토대로 한 것으로서 스키타이 모음곡의 미학에 이어져 있다. 이 무렵 프로코피에프는 막심 고리키와 마야코프스키를 알게 되지만 몇 달 뒤에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음악적으로는 혁명가였으나 정치에는 거의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활동의 장을 찾아내지 못하고 교육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 Lunacharski에게 미국으로의 망명 허가를 신청했다. 그는 1918년 5월 미국을 향해 가던 중 일본에 들러 몇 차례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일부 비평가들이 그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했으나 어쨌든 상당히 빨리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시카고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있던 이탈리아인 캄파니니 Campanini는 18세기의 작가인 Gozzi의 우화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을 토대로 한 오페라 테마를 그에게 의뢰한다. 프로코피에프는 곧 그 악보를 완성했으나 캄파니니의 돌연한 죽음으로 상연은 연기되고 말았다. 1920년 4월 그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으며, 파리에서는 디아길레프의 모임에 가담하여 스트라빈스키, 풀랑, 미요, 데 팔랴, 라벨 등과 친교를 맺었다. 프로코피에프는 파리 체재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여행을 했는데, 두 번째 미국 여행은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의 초연(1921. 12)을 위해서였다. 파리에서는 발레어릿광대가 상연되었고(1921. 5), 또한 피아노 협주곡 제3번도 그 해에 완성되었다(작곡은 1917년에 시작). 이 작품은 이전의 작품들보다도 더 합리적인 구조와 보다 교묘하게 처리된 활력을 지니고 있다.
 
1922년 프로코피에프는 바이에른 지방의 알프스 산 속에 있는 에탈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발레리 브류소프 Valrei Bryusov의 소설에 바탕을 둔 오페라 불의 천사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16세기에 일어난 X악마에 홀린 사건을 다룬 것이다. 동시에 그는 서방 여러 나라의 주요 도시(런던, 베를린, 브뤼셀 등)에서 연주활동도 계속했다. 프로코피에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노력과 아울러 이 무렵에 망명하여 러시아 음악을 활발하게 소개하던 지휘자 쿠세비츠키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23년 프로코피에프는 파리로 돌아가서 같은 해 러시아와 스페인의 피를 이어받은 젊은 카롤리나 류베라 코디나 Carolina LluberaCodina와 결혼하여 두 아들 스비아토슬라프 Sviatoslav와 올레그 Oleg를 얻었다.그는 교향곡 제2번(1924~25)을 작곡하여 구성주의 미학에 접근했는데, 여기에 오네게르가 퍼시픽 231을 통해 칭찬을 보내 왔다. 2년 후에 소련 연방에서의 새로운 생활과 공업화의 실현을 주제로 하는 구성주의적 발레를 작곡할 것을 디아길레프로부터 의뢰받아 강철의 걸음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1927년에 야쿨로프 Jakulov의 무대장치와 데조르미에르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몇 년 전부터 사실 프로코피에프는 점차 소련 연방에 이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서방사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연연해 하는 망명한 동향인들 틈에서도 프로코피에프는 자기 자신을 이방인처럼 여기게 되었다. 1927년 초에는 소련 연방을 처음으로 여행하여 미아스코프스키 같은 이전의 친구들과 다시 사귀게 되었고 자기의 국외에서의 작품이 이미 그곳에 들어와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강철의 걸음은 소련 사람들에게서는 비난을 받았으며 우스꽝스러운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1927년에 불의 천사를 완성한 프로코피에프는 이 오페라의 주제에서 교향곡 제3번의 작곡을 시도했다. 그 이듬해에는 디아길레프로로부터 새로운, 그리고 최후의 발레 작곡을 의뢰받는다. 이것이 복음서의 우화에 기초한 방탕한 아들로서 세르주 리파르 Serge Lifar가 주인공을 맡아 초연했다. 얼마 후 디아길레프가 베니스에서 죽자 프로코피에프와 서방세계와의 중요한 한 통로가 끊겨 버렸다. 그래서 그는 7년 동안 소련 연방과 서방 세계의 틈에 끼어 안정을 잃은 생활을 하게 된다. 1930년에 다시 미국을 여행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회 도서관의 위촉으로 현악4중주곡 제1번을 작곡하게 된다. 1932년 리파르와 협력하여 작곡한 발레 보리스텐 강가에서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었으나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 하나의 실패는 피아노 협주곡 제4번(1931)이다. 이 협주곡은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파울 비트겐슈타인 Paul Wittgenstein의 의뢰로 씌어진 것인데 비트겐슈타인은 헌정받은 그 작품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피아노 협주곡 제5번(1931~32)은 제2번이나 제3번과 유사한 작품으로서 이것은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프로코피에프는 아직 소련의 시민권을 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33년으로 접어들자 소련 연방으로부터 가장 흥미있는 몇 개의 작곡 의뢰를 받았다. 파인치머 Feinzimmer 감독의 영화를 위한 음악 키제 중위가 그 첫번째였는데, 이것은 대중의 감상 능력에 맞추어 보다 고전적인 양식으로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다. 1936년에는 어린이를 위하여 피터와 이리를 작곡했으며, 그밖에도 연출가 라들로프 Radlov와 협력하여 대규모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초연 1938 브르노)을 작곡했다. 이것은 프로코피에프의 최초의 소비에트적 발레이며, 또한 고전 문학에서 주제를 찾은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 발레곡에서 교향적 모음곡(포로코피에프는 무대작품의 대부분을 이러한 형식으로 편곡하고 있다)과 일련의 피아노 모음곡이 태어났다.
 
1937년 프로코피에프는 소련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 운이 나쁘게도 그가 조국으로 돌아간 것은 마침 권력의 통제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강화되던 시기였다. 1932년에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이 발족하고 1936년에는 유명한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멕베드 부인을 둘러싼 사건의 벌어졌는데, 이 곡은 음악이 아니라 엉터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에서 기피시된 음악가들도 형식주의라 하여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형식주의란 리듬이나 음색, 화성의 짜맞춤 등 음악의 여러 요소를 사용한 인공적인 것에 대한 추구로 인해, 음악이 지닌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희생시키는 것이며 최악의 오점으로 여겨져 왔었다. 많은 러시아 음악가(라흐마니노프, 샬리아핀, 체레프닌, 메트네르, 글라주노프 등)는 그들의 자유와 러시아에 있어서의 과거를 수호하기 위하여 소련의 미래를 부정하고 망명의 길을 택했으나 프로코피에프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필요 불가결한 원천이었던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하여, 그는 그 자유를 희생하고 소련이 공인하는 작곡가가 되었으며 이 지위에 따른 모든 득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1937년 프로코피에프는 수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혁명 20주년 기념을 위한 칸타타를 완성했다. 그는 이곳에서 레닌을 포함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텍스트에 음악을 붙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검열에 걸려서 이러한 종류의 텍스트는 노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영화감독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아이젠슈타인 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과의 만남으로 인한 협력관계는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역사적이고 애국적인 대프레스코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8)를 위하여 음악을 썼다. 여기서는 소비에트적 미학의 요구에 맞게 씌어진 민중적이고 서사적인 부분(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노래, 죽음의 들판에서, 〈피날레〉)과 작곡자의 서방 시대의 양식(푸스코프의 십자군 병사나 얼음 위의 싸움)이 모두 인정된다. 이 영화에 의해서 프로코피에프는 19세기 러시아 국민 오페라의 전통과 결부되고 있다. 1939년 12월에는 스탈린 탄생 60주년 기념을 위한 칸타타 축사를 작곡하면서 체제 찬사자의 합창에 가담했다. 같은 해 우크라이나의 내전에서 착상을 얻어 그의 첫번째 소비에트적 오페라 시메온 코트코를 작곡하는 동시에 새로운 피아노 소나타(전쟁 소나타라 불려지는 세 곡, 제6번, 제7번, 제8번)의 작곡을 시작했다. 이들 세 곡의 소나타는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작품 분야에서 창조의 정점을 형성하는 기념비적 작품이며, 앞의 두 곡은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을 소련에서 초연한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에 의해서 초연(1943), 제8번은 길렐스에 의해서 초연되었다(1944).
 
1940년에 그는 그의 새로운 동반자이자 협력자가 되는 젊은 시인 미라 멘델손 Mira Mendel'son과 알게 된다. 그녀는 그에게 셰리단 Sheridan의 성미까다로운 노파 The Duenna에 기초한 오페라 코미크 수도원에서의 약혼의 주제를 제안했고, 또한 그들은 톨스토이 원작에 의한 오페라 전쟁과 평화의 대본을 함께 각색했다. 이 오페라는 1941년에 작곡하기 시작하여 이후 프로코피에프는 죽을 때까지 그 작곡을 계속했다. 소련과 독일이 적대관계로 들어가자 곧 프로코피에프는 다른 많은 예술가나 지식인들과 함께 카프카즈 지방으로 옮겨 가서 그곳에 2년간 머물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칸타타 이름도 없이 남겨진 소년의 발라드나 카바르다 지방의 주제에 바탕을 둔 현악4중주곡 제2번,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이 곡은 뒤에 오이스트라흐의 의뢰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하여 개작된다) 등을 작곡했는데, 특히 플루트 소나타는 고뇌의 색깔이 짙은 비장한 작품이 많이 작곡된 이 시기에 그 명쾌함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뭉클하게 하였다. 그러나 1942년부터 프로코피에프는 특히 새로운 역사 영화 이반 뇌제의 제작에 수반하여 아이젠슈타인과의 협력을 재개했다. 이 영화는 1945년에 제1부를 상연하여 스탈린 상을 수상했으나 제2부는 검열에 걸려서 상연이 금지되었다(1958년 이후 상연된다). 1948년 아이젠슈타인이 죽자 영화음악 분야에서의 프로코피에프의 활동은 끝나게 된다.
 
1945년부터 1947년에 걸쳐서는 지난 수년간 스케치해 오던 여러 작품을 완성하여 초연했다(교향곡 제5번, 발레 신데렐라[초연 1945. 12. 볼쇼이 극장], 오페라 전쟁과 평화의 제1부[초연 1946. 6. 말리 극장, 레닌그라드] 등). 또한 10월 혁명 30주년 기념을 위한 두 곡의 작품 축제의 시와 번영하라, 힘찬 국토여를 작곡한 동시에, 1947년에는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제9번을 작곡하여 리히터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에서는 어법상의 어떤 간소화가 엿보인다. 같은 해에 그는 R. S. F. S. R.로부터 국민예술가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러나 이 영예도 이듬해의 안드레이 즈다노프 Andrei Zhdanov가 공표한, 일찍이 보기 어려웠던 가혹한 형식주의 비판에서 그를 옹호할 수는 없었다. 이 비판은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 미야스코프스키나 카발레프스키 등,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에게까지도 미쳤다. 프로코피에프의 일련의 모든 작품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그의 서구 시대의 작품(어릿광대, 강철의 걸음, 방탕한 아들, 불의 천사 등)에 비판이 심했고, 피아노 소나타 제8번 같이 소련 시대에 작곡된 작품에까지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프로코피에프는 자기 비판을 강요당했는데 비판을 면한 몇 개의 작품(로미오와 줄리엣,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교향곡 제5번 등)으로 주의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수개월 후 그의 신작 오페라 진실한 인간의 이야기는 전시 중 소련 공군 비행사의 영웅적인 생애를 다룬 작품인데도 검열에 걸려 상연이 중지되었다.
 
불안정한 건강상태(고혈압)에도 불구하고 프로코피에프는 모든 정력을 작곡에 기울였다. 1950년에 그는 평화의 수호자를 작곡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그의 만년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로스트로포비치와 리히터를 위하여 작곡한 피아노와 첼로 소나타, 교향곡 제7번, 그리고 특히 발레곡 석화(石花) la fleur de pierre가 있다. 석화는 우랄의 전설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1954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전후 프로코피에프가 살았던 곳은 모스크바 교외인 니콜리나 고라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1953년 3월 5일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실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은 바로 스탈린이 죽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종교음악을 제외한 모든 장르의 작품에 손을 댔다. 그는 그 자신의 최고의 것을 피아노 음악(그의 협주곡, 소나타, 그리고 수많은 소품은 20세기 피아노 음악의 레퍼토리 중 제1급에 속한다), 발레음악, 영화음악에 쏟아 넣었다. 특히 발레나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음악에서는 시각적인 움직임이나 정경에 대해서 음악에 의한 등가물(等價物)을 만들어내는 데 뛰어났다. 그의 오페라 음악은 도박사나 불의 천사에서의 명백한 힘과, 시메온 코트코 Simeon Kotko와 전쟁과 평화의 몇몇 에피소드에도 불구하고 더한 불균등을 나타냈다. 프로코피에프는 성악서법 분야보다는 화성이나 기악 분야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혁신적이었으며 심리학자라기 보다는 삽화가, 해설가였다. 그는 현실적, 자발적이었으며 구상(具象)과 미래에 눈을 돌리고 있었고, 또한 신랄하고 엄격하며 종교적이고 도발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항상 그의 선율의 창작을 자신이 만들어낸 갖가지 양식에 적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형식과 견고한 구성에 대한 감각과 교묘한 착상의 처리 방법에 의해 고전파 음악가들의 직접적인 후계자였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대체로 그가 다작가이며 또한 어떤 경우에나 쉽게 적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ergey Prokofiev Sonata for two violins in C major, Op. 56
Violin1 : Anton Barrachovsky Violin2 : Vadim Repin

전악장 Play
1악장   Andante cantabile
2악장   Allegro
3악장   Commodo (quasi Allegretto)
4악장   Allegro con brio
Paint by Eszter Burgha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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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불멸의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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